이병로의 백패킹 연가 _ 시에라 네바다中

 

 

화백의 붓끝이 그려낸 달 항아리

세실과 나눈 이심전심(以心傳心). 말이나 글이 아니라, 세실이 전해주는 마음에, 마하가섭의 염화미소(拈華微笑)가 내게도 피어오르는 듯하다. 세실, 그 비경의 감동은 내가 그동안 고대하던 이러저러한 것들이 아닌, 그 너머 그 이상의 것이었다.

글 · 이병로 미국 주재기자  사진 · 이병로, 이한영

상쾌한 아침이다. 산에서 맞는 아침은 늘 싱그러워 머리가 맑아진다. 미나렛 레이크의 잔물결을 일으키며 다가온 옅은 바람이, 폐부 깊숙이 시원하게 씻어주는 듯하다. 몇 발자국을 떼다가, 미나렛 레이크와의 작별이 아쉬워 뒤를 돌아본다. 미나렛 레이크, 그 뒤로 펼쳐진 골짜기와 산세가 맴모스 레이크 시까지 거침없이 이어지니, 그 풍광이 장쾌하기만 하다.

“형님, 세실로 출발합시다.”

비원의 일주문, 미나렛 레이크를 뒤로 하고, 신의 비원의 내실 격인 세실 레이크로 향한다. 세실 레이크는 미나렛 레이크 보다 고도 150여 미터 위에 위치한다. 높여야 할 고도는 그리 크지 않지만, 클래스 2(class 2) 난도의 탈러스(talus) 및 스크리(scree) 지형인 급경사를 치고 올라야 한다. 제2 비경, 세실 레이크로 향하며 마음을 추스려본다. 더군다나 이제부터는 온트레일(on trail)이 아닌 오프 트레일(off trail)이다. 

흙빛 근육질의 세실 레이크 수문장

희미하게 보이는 길을 따라 우뚝 서 있는 클라이드 미나렛(Clyde Minaret) 봉을 마주하며 북쪽으로 발걸음을 이어간다. 500여 미터를 오르니 클라이드 미나렛 봉을 호위하듯 북쪽으론 거대한 성벽이 가로막고 서 있다. 세실의 비경으로 이르는 길, 누구의 접근도 섣불리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빗장을 굳게 걸고 있는 형세이다. 세실 레이크가 그 성벽 뒤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저 성벽을 바로 직등하는 것은 무리다. 발길을 동향으로 선회하여 우회하니, 경사 35도에서 50도 정도의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스크리 지형의 오르막은 하늘과 맞닿은 듯이 바짝 서 있고, 우리의 입성을 시험하겠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다. 23kg에 육박하는 배낭을 메고 자갈길 위로 묵직한 걸음을 한발 한발 옮긴다. “싸그락 따그락 싸그락 따그락” 자갈을 밟을 때마다 자갈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소란스럽다. 그 소리가 흡사 개구리 떼의 합창 같아, 공연히 고요한 시에라의 아침을 깨우는 듯하다.

지난겨울 눈산행을 하며 다쳤던 무릎의 통증이 경사를 따라 시나브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자갈길을 따라 고도를 높이자 이윽고 급경사로 가려진 칠흑빛의 볼케이닉 리지 웨스트 산(Volcanic Ridge West Mountains·3,505m)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우락부락한 흙빛 근육질을 자랑하며, 마치 세실의 수문장처럼 사면을 막고 서서 출입자를 감시라도 하는 듯 우리 일행을 주시하고 있다.

그 아래 걸리(gully) 지형엔 스노우팩(snowpack) 설원이 형성되어 있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땀도 식히고, 달콤한 휴식 속에 주변을 살펴본다. 클라이드 미나렛 봉이 북쪽에서 우리를 굽어 볼 뿐, 세실의 모습은 여전히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걸리 지형을 우측으로 끼고 탈러스 지형의 옅은 구릉을 더 오르고 나니, 순간 숨이 턱 막힌다.

“헉, 기막힌 풍경에 숨이 막힌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오감 너머 감각에 닿는 곳

둥그런 달 항아리 모양을 하고, 짙은 청빛 설빙으로 덮인 세실 레이크. 그리고 세실의 빙설을 뚫고 하늘로 우뚝 치솟아 있는 클라이드 미나렛 봉. 그런데 희한한 일이다. 거북의 등껍질처럼 두껍게 얼어붙은 이곳 세실 호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나무의 향도, 싱그러운 물의 향기도, 흙냄새도. 설상가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흐르는 물소리도, 새소리도, 바람 소리도. 

이곳은 시각도 온전히 멈춰진 듯, 오로지 호수를 점령한 설빙과 유빙이 짙은 청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보다, 온몸으로 밀려오는 이 감동은 무엇이라 표현할까?’ 말이나 글이 아니라, 그 너머의 언어이고 오감 너머의 감각 같은 것. 바람도 세실의 설빙 위에 얼어붙고, 모든 향도 세실의 설빙 밑에 묻혀 버린 듯. 오감 넘어서 느껴지는 상쾌함이, 손을 뻗치면 닿을 거리에 있다.

클라이드 미나렛 봉은 용맹한 장수처럼 세실 레이크를 호위하듯 서 있고, 한편으론 세실을 수련터 삼아 선방에 앉은 고승의 단단한 뒷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거대한 침봉 아래 둥근 형상의 세실이 뿜어내는 풍광은, 장대하면서도 단아하여 선(禪)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마치 화백의 붓끝이 침봉을 지나 세실을 그려낸 직후, 그 붓이 날린 먹물을 머금고 있는 수묵담채화를 보는 듯하다. 묵향이 은은하게 퍼지며 압도적인 장대한 풍경에 여백의 미가 깃든다.

신비스러우면서도 성스러운 광경 앞에, 마음을 가다듬고 잠시 세실과 클라이드와 이심전심 호흡을 주고받는다. 소란스럽던 망상들은 청빛 빙설에 잦아들고,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며 몸은 투명해진다. 비로소 세실과 클라이드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 마음이 이내 고요하고 청정해진다. 

북 시에라 하늘금을 지배하는 리터 산군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신비로운 기운으로 꽉 채워진 신의 밀실을 지나간다. “사박 사박 사박 사박…” 크램폰이 반쯤 얼은 눈을 으깨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진다. 세실을 감싸고 있는 설원은 썬컵(suncup)이 형성되어 있는 완경사 지역이지만, 눈 아래는 너덜지대 인지라 군데군데 크레바스가 도사리고 있다. 크램폰을 착용하고 걷는데도 여러 번 빠지기 일쑤다.

반면, 선배는 발에 모터라도 달렸는지, 크레바스를 요리조리 잘 피하며 성큼성큼 휑하니 앞질러 간다. 어느새 세실 레이크의 말미에 당도해, 느리게 오는 이 몸을 기다려 주신다. 행장을 풀고 세실의 끝자락에서 느긋한 휴식을 취한다. 미나렛 침봉들이 그어 놓은 하늘금을 뒤돌아보며 감상에 젓는다. 선배와 서로의 느낌을 나누며 클라이드 미나렛봉과 리터 산군의 얘기도 덧붙인다.

“형님, 저기 세실 레이크 위로 뻗은 능선 보이시죠? 세실 레이크를 향해 내리뻗은 능선이 바로 클라이드 미나렛봉의 남동면인데, 기술 등반지로 유명한 루트(southeast face route)로, 북미 50대 클래식 등반지 중에 하나입니다. 언젠가 꼭 한번 등반해보고 싶습니다.”

“가만 보니 리터 산군의 최고봉 리터 산이 형님 격으로 배너 픽과 미나렛봉을 좌우로 두고, 동생들 어깨를 보듬고 있는 듯하네. 배너 픽(Banner Peak)은 천섬 호(Thousand Island Lake)와 가넷 레이크(Garnet Lake)를 좌우로 품고 있어 리터 산군의 얼굴마담 같이 느껴지고.”

“그러네요(웃음). 각 산과 봉의 역할이 재미있습니다. 최고봉 클라이드 미나렛 봉을 필두로 줄지어 서 있는 미나렛 침봉들은 리터 산군의 잘 빠진 ‘S라인’ 몸매를 자랑하는 것 같지 않나요?”

선배와 나, 우리 일행은 순간 웃음이 터진다. 리터 산은 1872년에 존 뮤어(Jone Muir)가 초등을 하였다. 존 뮤어는 리터 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 시에라의 전경, 특히 미나렛의 풍광에 특별히 매료되었는데, 그의 저서, ‘The Mountains of California’에서 리터 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을, 그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다만, 필자의 느낌으로 의역함).

“남녘으로 뻗어 내린 능선을 굽어보니, 뾰족뾰족 날렵하게 솟은 침봉들이 시선을 사로잡고. 300m 이상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솟은 봉우리들은 눈을 이고 있고. 그 눈들은 다시 봉우리 사면을 따라 기울어져 빙하를 이루고 있으니. 이 침봉들이 펼쳐 놓은 하늘 금은, 마치 날카로운 날을 세워 얼음을 뚫고 튀어 올라 하늘을 치는 듯하여, 이 풍광은 천상의 신이 빚은 환상적인 자연의 조각품이 아닐 수 없다. 이 침봉들이 바로 ‘미나렛(Minarets)’이다.” 

유쾌한 상상 가득한 아이스버그

세실의 끝자락에 서니, 아이스버그 레이크(Iceberg Lake) 전경이 발아래 펼쳐진다. 아이스버그 레이크도 또한, 유빙과 설빙이 뒤덮고 있다. 세실 레이크는 아이스 버그 레이크로 물길을 내어주어, 급경사 사면을 타고 작은 폭포를 이루며 떨어진다. 그 옆으론 아이스버그 레이크로 가는 급경사의 내리막 길이 마치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 마냥 유쾌하게 펼쳐져 있다.

한편, 아이스버그 레이크 가장자리 한 곳엔 유람선처럼 커다란 너럭바위가 승선을 기다리고 있는 듯, 재미난 풍광이다. 그 모습에 놀이동산의 게이트를 통과하는 아이처럼 길 앞에서 괜스레 신이 난다. 이제, 내리막을 따라 아이스버그 레이크로 향한다.

아이스버그 레이크로 향하는 길은 ‘클래스 3(class 3)’ 난도다. 50도 이상의 급경사이며, 내리막 길이 대부분 눈에 덮여 있어 크램폰과 아이스 엑스가 반드시 필요한 곳이다. 눈이 쌓여 있지 않다면, 큰 위험 없이 내려갈 수도 있겠지만, 오늘 일정 중 가장 난도가 높은 구간이다. 발아래 시원하게 펼쳐진 얼음 호수의 전경을 만끽하며, 크램폰으로 스텝을 찍고, 아이스 엑스로 균형을 잡으며 눈사면을 타고 내려간다.

약 1km의 설빙 지역을 통과하니 어느덧 아이스버그 레이크의 반대편에 서 있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니, 거대한 설벽이 세실 레이크를 방호하고 있는 듯하다. 반면, 아이스버그 레이크는 눈벽으로 조성된 거대한 원형경기장 같은 형상이다. 호수 위엔 커다란 한 쌍의 너럭 바위가 보트처럼 떠, 반대편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미나렛 침봉들과 반대편 볼케이닉 리지 웨스트 산군의 봉들이 아이스버그 레이크를 에워싸 굽어보는 형상이다. 이러한 전경이 재미있는 상상을 유발시킨다.

‘주위 봉들이 아이스버그 레이크에서 보트 경주를 기다리는 듯이 기웃거리는 것이 아닐까?’

미나렛이 풀어낸 세 호수의 색채

아이스버그 레이크 한쪽 편에 행장을 풀고, 점심상을 차린다. 아이스버그 호수의 빙하수를 정수하여 갈증부터 해소한다. 처음 느껴 보는 빙하수, 그 맛은 시원하다 못해 명징하다. 빙하수로 끓인 즉석 국수로 허기를 채운 후, 이곳저곳 거닐며 미나렛~세실~아이스버그 호수가 주는 감동을 음미해본다.

이 세 개의 호수는 우애 좋은 세 자매 같기도 하고, 신비로운 세 여신 같기도 하다. 세실 레이크의 고도가 대략 3,150m이고, 아이스버그 레이크는 미나렛 레이크와 함께, 그 고도가 대략 2,980m이니, 높이로 볼 때, 세실이 큰 언니, 우측 미나렛이 동생, 좌측 아이스버그가 막냇동생이다. 그들은 서로 손은 맞잡고 있는 모습으로도 비춰진다.

시에라에 병이 깊어, 달려든 신의 비원 사십 리에 펼쳐진 비경. 한마디로 압축하면 뭐라 할까? 굳이 할 필요도 없고, 애써 군더더기 될 것이 뻔하지만. 미나렛~세실~아이스버그 레이크, 이들은 미나렛 봉들이 빚어낸 프리즘, 신의 비원 그 자체이다. 그 색채는 미나렛은 장쾌, 세실은 상쾌, 그리고 아이스버그는 유쾌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이제 시에라 하이 루트(Sierra High Route)를 따라 니다이버 레이크(Nydiver Lake)로 이어간다. 

 

이병로 미국 주재기자 

샌프란시코 베이산악회. 존 뮤어 트레일을 비롯해 시에라 네바다의 다양한 트레일을 걸었으며, 현재 애팔래치아 트레일 버지니아 구역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