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교육-배움
2024.06.25 07:32

<창칼 37> 내 인생의 황금기

profile
Views 585 Votes 0 Comment 2
?

Shortcut

PrevPrev Article

NextNext Article

Larger Font Smaller Font Up Down Go comment Print Attachment
?

Shortcut

PrevPrev Article

NextNext Article

Larger Font Smaller Font Up Down Go comment Print Attachment
<창칼 37> 내 인생의 황금기
                     (The Golden Age of My Life)
 

짧지 않은 내 인생에 황금기(黃金期)가 있었다.

그것은 20대 중반을 막 넘은 스물여섯 살과 스물일곱 살에 이르는 1여년의 짧은 기간이었다.

대학을 마치고 군 복무를 끝낸 직후, 유학을 떠나기 전의 짧지만 빛나던 공백기.
나는 그 시간 동안 아무것도 이루지 않았고, 어떤 성취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충만했다.
처음으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삶.
오롯이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날들이었다.

어쩌면, 나를 규정할 어떤 ‘정체성’조차 없었기에
나는 더 자유로웠는지도 모른다.
나를 덧씌우던 모든 이름과 역할이 벗겨진 자리에서
나는 순수한 나로, 투명하게 존재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남의 간섭으로부터도, 스스로 부여한 의무로부터도 벗어나 있었다.
어떤 관계에도 매이지 않았고, 오직 나와 마주하고 대면할 수 있었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나의 내면을 천천히 들여다보며
조용한 기쁨과 깊은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삶의 맛은 거창한 것에서 오지 않았다.
작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확실한 행복’을 발견하는 ‘소학행’도 배웠다.

그 행복감의 비결은 각성을 통해 마음이 단순해지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그 단순함은 꽃과 나무, 바람과 햇살과도 연결되게 했고,
확장된 의식은 우주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감지하게 만들었다.

그 무렵,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행복은 어디에 가서, 무엇을 이루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며, 의식을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몰입과 명상의 시간 속에서
나는 시간의 흐름이 멈추고,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오직 ‘지금 여기’만이 존재하는
경이로운 순간들을 자주 맞이했다.

하지만 그 후로는, 유학을 떠나고, 사회인이 되어
언제나 무언가가 되기를, 무언가로서 살아야 했다.
어떤 이름, 어떤 신분, 어떤 역할 속에서
자유롭던 나를 조금씩 감추고 살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확신할 수 있다.
그 시절이야말로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그렇다면, 그 마음의 단순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첫째, 나는 당시 책 속에서 나의 정신적 스승들을 만났다.
그 만남은 내 의식을 흔들고 깨우는 혁명이었다.

둘째, 유학 준비를 구실 삼아 고향집에 머무르며
어떤 사회적 압박도 받지 않는, 드물고도 너그러운 시간을 선물 받았다.

셋째, 책을 읽는 단순한 행위 속에서
깨어있는 의식과 몰입이 가능하다는 걸 처음으로 체험했다.

넷째, 의식이 확장되며
일상이 우리의 의식을 얼마나 축소시키는지를 절감했다.

다섯째, 열린 의식은 나를 객체화하여 관조하게 했고,
사물들을 더 넓은 그림 속에서 조망할 수 있는 시선을 길러주었다.

여섯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비일상적 의식 상태는 몰입을 쉽게 불러오며,

일곱째, 그 몰입이야말로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깊고 순수한 행복이라는 것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 적정(寂靜)하고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솟아오른 내면의 엑스터시는
내가 살아오며 겪었던 어떤 쾌락과 만족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이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와 아브라함 매슬로(Abraham Maslow)가 말했던
‘인간의 절정 체험(peak experience)’을 나는 이미
그 젊은 날의 적정한 고요 속에서 맛본 셈이었다. (필자의 이전글, '몰입 과학' 링크

최근, 성해영 교수는 “종교 이후의 종교” 시대를 예고했다 (링크)
제도화된 조직 종교가 쇠퇴하고,
내면의 엑스터시를 통한 개인 종교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 했다.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그 새로운 시대를 미리 맞이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이제, 인생의 후반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그 황금기는 나를 지탱해주는 숨은 기둥이 되고 있다.
단조로운 일상을 넘어서
더 넓은 자아, 더 깊은 정체성을 향해 나아가게 해주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남아 있다.

삶의 마감이 내게 가만히 손짓하는 이 시점에,
나는 조심스레 소망한다.
그 첫사랑 같은 황금기의 시간이
다시 한 번, 내 인생에 찾아오기를.

이제는 더 깊은 성숙과, 더 넓은 영혼으로
그 시절을 다시 껴안기를.
마치, 오래 잊었던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것처럼.
 
 

golden age 사진.jpg

  • profile
    창공 2024.06.25 07:34

    본문에 인용된 책:

    1. William James. 1902.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다양한 종교의 체험)  https://a.co/d/0cv572zM. /  https://en.wikipedia.org/wiki/The_Varieties_of_Religious_Experience

    2. Abraham Maslow. 1964. Religions, Values, and Peak-experiences (종교, 가치와 최절정 경험들)  https://a.co/d/099QglY0

    3. 성해영. 2024. 내 안의 엑스터시를 찾아서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653578

     

    서울대 성해영 교수의 2024년 강연, "과거의 종교는 죽어야 한다": 

     

  • profile
    창공 2024.06.25 19:41

    이글에서 언급된 "엑스터시(ecstasy)"는 사전적으론 "황홀경, 희열"이지만, 어원적으론 '나 밖에 서다(ecs+stasy)'라는 뜻으로, 일상적 의식을 넘어 확장된 의식의 경지를 의미합니다. 아름다운 경치에 황홀해질 때도 이와 유사한 상태에 접어들죠. 

    이런 '나를 넘어서는 의식'에는 메타 인지(자기 인식을 넘어선 사고)부터 초월 의식(육감 이상의 확장된 의식)까지 다양한 단계가 있습니다. 초월 의식은 오감에 갇힌 자아를 벗어난 영적 진화의 상태로, 탈동일시(자기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훈련)나 몰입(FLOW)을 통해 접근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경지나 예술적 황홀경도 엑스터시와 연결되며, 윌리엄 제임스는 이를 "인간 의식의 최절정"이라 설명했습니다. 엑스터시는 단순한 희열이 아닌, 의식의 확장을 이끄는 핵심 개념입니다.


  1. No Image

    맹자이야기 6

    梁惠王曰: “寡人之於國也, 盡心焉耳矣.(과인지어국야 진심언이의) 河內凶, 則移其民於河東, 移其粟於河內.(하내흉 즉사민이어하동 사기속어하내) 河東凶亦然. 察鄰國之政, 無如寡人之用心者.(하도흉역연 찰인국지정 무여과인지용심자) 양혜왕이 말하길(梁惠王...
    Date2024.11.09 Category교육-배움 ByFAB Reply1 Views491 Votes0
    Read More
  2. <칼럼 41> 한강은 되고, 왜 하루키는 안 됐을까? 

    <주의> 이 칼럼은 산행과 무관한 내용으로써 한 개인의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 제공하는 글입니다. 이 점을 주지하셔서 주제에 관심이 없는 분들은 부담없이 패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칼럼 41> 한강은 되고, 왜 하루키는 안 됐을까? 한강 작가의 노벨 문...
    Date2024.11.04 Category문화 예술 By창공 Reply2 Views619 Votes0 file
    Read More
  3. No Image

    맹자 이야기 5

    이제부터는 제목을 맹자 이야기로 변경해서 올립니다. 내용이 어렵다는 민원이 들어와서 좀더 현대적인 표현으로 해석하고, 주희의 해석 부분은 필요하지 않으면 생략해서 내용을 간단하게 작성하겠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관심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Date2024.11.01 Category교육-배움 ByFAB Reply3 Views683 Votes0
    Read More
  4. A blessing in disguise in Portland, Oregon

    어쩌다 보니 살이 빠졌습니다. 직장과 주변에서 이런 저를 보고 어찌 살을 뺐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반복되는 질문에 답하다 좀 귀찮아져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시작은 몸무게를 잴 이 저울을 구입하면서 입니다. https://a.co/d/0MjSNx0 이...
    Date2024.10.31 Category건강-웰빙 ByYC Reply6 Views524 Votes0 file
    Read More
  5. No Image

    뜬금없이 시작하는 맹자이야기 4

    3편의 조회수가 줄어든 걸로 보아 맹자이야기의 관심도가 점차 정상으로 가는 거 같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끝까지 가봐야겠습니다. 5 년 이상 걸릴 겁니다. 이제부터는 제후와 백성이 함께 즐기는 것에 대하여 양혜왕과 맹자간의 연못가에서 대화가 전개됩니...
    Date2024.10.17 Category교육-배움 ByFAB Reply0 Views603 Votes0
    Read More
  6. <칼럼 40> 한강의 작품과 기억에 대한 소고(小考)

    <칼럼 40> 한강의 작품과 기억에 대한 소고(小考) 최근에 있었던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여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여린 감수성의 소유자임에도 폭력에 대해서 온 몸으로 아파하면서 거부하고 저항했던 그녀.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광주 5.18...
    Date2024.10.16 Category문화 예술 By창공 Reply0 Views771 Votes1 file
    Read More
  7. 오늘은 슬프지만 그래도 희망의 내일을 꿈꿔 봅니다

    3년전쯤으로 기억합니다. 이스트 시에라의 McGee Pass 로 들어가 JMT 를 타고 남행하여 Mono Pass 로 나오는 45마일 정도의 백팩킹 계획이었습니다. 둘째날 McGee Pass (12, 300ft) 를 넘는데 6월중이라 그런지 패스 부근에 제법 많은양의 눈이 있었고 눈을 헤...
    Date2024.10.13 Category기타 By보해 Reply14 Views793 Votes3 file
    Read More
  8. No Image

    뜬금없이 시작하는 맹자이야기 3

    未有仁而遺其親者也, 未有義而後其君者也.(미유인이유기친자야 미유의이후기군자야) 인하면서도(仁而) 그 부모를 버린 사람은(遺其親者) 아직 있지 않고(未有也), 의로우면서도(義而) 그 임금을 뒤로한 사람은(後其君者) 아직 있지 않습니다(未有也). 한자 토...
    Date2024.10.12 Category교육-배움 ByFAB Reply0 Views604 Votes0
    Read More
  9. No Image

    뜬금없이 시작하는 맹자이야기 2

    맹자집주를 보아가면서 진행하려니 본문이 상당히 길어집니다. 주희의 해석이 절대적이라고는 할수 없겠지만, 조선을 디자인한 정도전 선생으로 시작한 조선 성리학이 주희본을 텍스트로 선택하여 그것이 거의 바이블처럼 되어 있다보니 자연히 주희본을 선정...
    Date2024.10.04 Category교육-배움 ByFAB Reply0 Views695 Votes0
    Read More
  10. 설악산 암릉 이야기 3편 설악산 리지의 개척 등반사 (퍼옴)

    설악산 리지의 개척 등반사 (울산암, 천화대, 용아장성, 공룡능선을 설악산은 천태만상의 얼굴을 하고 수많은 등산객들을 맞이하는 천혜의 도장이다. 장대한 능선과 깊은 계곡, 사시사철 변화무쌍함을 보여주는 기암절벽은 많은 등산객들을 유혹한다. 산을 좋...
    Date2024.10.03 Category문화 예술 By돌고래. Reply1 Views572 Votes1
    Read More
  11. No Image

    설악산 암릉 이야기 2편 석주길

    하늘에서 꽃이 내려와 앉았다는 천화대(天花臺)는 설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암릉길이고 그곳에는 '흑범길', '염라길', '석주길' 등 멋진 암릉길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석주길'은 아름다움 보다는 그곳에 얽힌 설화 같은 이야기로 더 유명하다. 그 슬픈 이야기는...
    Date2024.09.29 Category문화 예술 By돌고래. Reply1 Views460 Votes0
    Read More
  12. No Image

    고국의 산 설악산 암릉 이야기 1편 천화대

    여기 모두 산이 좋아서 모인 분들이라 다른 이야기보다 산에 관련된 이야기를 함 풀어 보겠습니다 물론 퍼 왔고요 제가 한국에 있을때 제일 좋아한 산 설악 입니다 지금은 자주 못가지만 항상 그리운 설악 입니다 설악산은 천태만상의 얼굴을 하고 수많은 등산...
    Date2024.09.28 Category문화 예술 By돌고래. Reply2 Views629 Votes2
    Read More
  13. 뜬금없이 시작하는 맹자이야기

    네~~~~ 뜬금이 없지만, 뭐, 여기는 자유로이 글을 쓰는 공간이니깐 시작해보려 합니다. 제가 산악회를 위해 할 수 있는게 뭘까 생각하다가 "맹자"라는 책을 장기간에 걸쳐 주 1회 올려보는 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4,5 년 정도는 걸릴꺼 같습니다. 어...
    Date2024.09.27 Category문화 예술 ByFAB Reply5 Views906 Votes0 file
    Read More
  14. <창칼 39> 내가 의지하는 가장 소중한 친구

    <창칼 39> 내가 의지하는 가장 소중한 친구 초등학교 5학년 여름이었던 것 같다. 집 앞에 있는 큰 호수에서 친구 서너 명과 멱을 감으며 놀고 있었다. 그때, 헤엄을 잘 치는 친구가 수심이 깊은 곳으로 가서 놀자며 그쪽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 당시 수영...
    Date2024.07.24 Category건강-웰빙 By창공 Reply4 Views724 Votes0 file
    Read More
  15. <창칼 38> 내 안의 야만성을 찾아서

    <창칼 38> 내 안의 야만성을 찾아서 (부제: 일상 속 야만 타파를 위한 코드) 최근에 “야만의 시대(링크)"라는 책을 접하게 됐다. 교회 조직의 힘을 빌려 인권 유린과 착취가 성행하던 중세의 참혹한 실상을 담은 한 프랑스 농노의 회고록이다. 이 회고록에서 ...
    Date2024.07.09 Category기타 By창공 Reply4 Views881 Votes0 file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Nex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