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웰빙
2024.01.24 21:43

<창칼 25> 나는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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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칼 25> 나는 몸이다!!
(부제: 몸의 노래 - 몸의 철학)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두 번의 큰 위기가 있었다. 
 
하나는 고등학교 때 장기간의 수면 부족으로 몸이 그냥 무너져 버린 일이 있었다. 6개월 이상을 잠을 거의 안 자면서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결과는 망신창이가 된 몸이었다. 돌아보면 내자신의 큰 과욕이 있었고 또 과열된 입시교육의 한 희생양이기도 했다. 결국, 학업을 지속할 수 없어서 학교를 쉬어야 했고, 이 후로 몇 년간의 굴곡진 인생 여정으로 쓰디쓴 경험들을 겪어야 했으며 이로 인해 나의 삶의 방향도 완전히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군대에서 부상을 당하여 제대 후에도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은 그야말로 통증으로 가득찬 생활이었고, 그 고난의 강도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당시 수영을 포함한 꾸준한 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공부를 포기하고 귀국했을 것이다. 이 기간에 운동만이 유일한 진통제였고 활력을 찾아주는 에너지원이자 구원자였다. 
 
책을 써도 모자랄 파란만장한 경험을 두 단락으로 짧게 줄여 보니, 생생한 감회가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역경을 통해 내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교훈은 “나는 몸이다”라는 것이다. 아무리 정신이 중요하다고 해도 몸이 훼손되거나 정상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우리는 혼란과 절망에 빠지게 된다. 온전한 몸이 없을 때, 우리는 존재의 의미도 가치도 잃어버리고 정신은 바닥으로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체험을 통해, 온전한 몸을 지키는 것만큼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인식이 내 삶을 지배해 왔다. 몸에 대한 나의 관심과 사랑, 열정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운동과 관리로 통증을 극복해 온 세월들이 나에게는 몸을 지키고 다져나가는 항해의 등불과 키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인류가 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간략히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몸과 정신을 하나의 통합체로 보는 사상가들이 있었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아리스토텔레스히포크라테스이다. 이들은 몸과 정신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몸과 정신 모두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철학의 아버지인 플라톤(Plato)은 이와는 다른 심신이원론을 구성하였고, 이에 바탕을 두고 발전한 주류 서양사상과 종교들은 몸을 욕망의 근원이라 여기며 금욕과 억압의 대상으로 보고 철저히 부정하고 폄하를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기독교 사상을 들 수있다.
 
기독교 정신에 이어, 서양 문명의 이런 이원론적 기반을 더욱 강화시킨 것은 16세기 쯤에 데카르트(Descartes)라는 철학자가 등장하면서였다. 이 이후의 서양사상의 근간이된 합리주의의 사상에 힘입어 정신이라는 이분법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이는 몸을 지배하는 것은 정신이라는 인식을 낳았고 이러한 사고는 현대 서양의학의 뿌리가 되어 몸을 정신의 하부 구조로 보고 마치 기계 다루듯이 몸을 대하는 전통이 이어져 오게 된다. 몸을 함부로 다루거나 학대를 하는 악습들이 행해져 온 것도 이런 사상의 영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들어 이런 심심이원론적 사상들을 단칼에 베어버린 인물이 니이체(Nietzsche)이다. 중세와 근대까지의 서양사상을 지배하던 기독교 정신과 데카르트적인 합리적 이원론을 비판하는 가운데 니이체는 위버멘시의 초인정신과 몸의 생명사상을 가지고 몸의 생명력과 소중함을 부활시켰다 (아래댓글 참조). 비슷한 시기에 심신의학(psychosomantics)이라는 개념이 나와서 신과 육체의 상관성 개념에 입각하여 정신이 몸에 미치는 혹은 몸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들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심신의학은 현대 의학에서 중요한 분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몸과 정신의 통합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한편, 데카르트에 의해 설정된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은 또 한 명의 인물로, 20세기 초에 메를로 퐁티(Merleau-Ponty)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등장하였다. 그는 “체화된 마음(embodied mind)”라는 개념을 들고 나와 몸의 중요성을 주창했다. 즉,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지각 경험을 통해 형성되며, 따라서 그 지각의 핵심인 몸이야 말로 우리의 마음을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동양의 요가와 불교 철학 뿐만 아니라 한의학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게 되고 후대의 심리학, 교육학, 인공지능, 로보트학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아래 댓글 참조). 
 
한 때 내가 몸 담았던 인지언어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이 이론에 따라서 비유 언어를 연구해 본 적이 있는데, 감정 표현들이 신체에 의지해서 발현되는 패턴이 여러 언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가슴이 덜컥하다, 간이 떨린다, 오금이 저린다, 소름이 돋다 등등의 신체 언어를 동반한 환유의 언어와 겁을 먹다, 두려움을 삼키다, 무서움을 떨쳐버리다 같은 수많은 은유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가 찾아낸 두려움환유은유 표현만 해도 100여 개가 넘는다. 이는 영어를 포함한 다른 언어에서도 비슷한데, 이를 두고 감정의 (신)체화(embodiment of emotion)라고 한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메를로-퐁티체화된 마음 개념과 유사한데, 일상에서 흔한 이런 비유 언어는 인간 감정의 뿌리가 몸에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몸과 마음의  밀접한 연결관계를 시사한다.
 
진화론적으로는 기억은 감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감정은 몸으로 구현된다. 처음에 감정이 많지 않았던 인간이라는 동물이 몸의 작용이 발달하면서 감정이 진화하게 되고, 상징적 언어가 출현하면서는 감정이 급속도로 풍부해진다. 즉, 인간은 몸 > 감정 > 기억 > 인지로 연속체로 진화를 해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슬픈 감정을 느낄 때 눈물을 흘리고, 행복한 감정을 느낄 때 미소를 짓는다. 다시 말해, 기억 (=인지), 감정 등이 몸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은 감정과 인지 발달에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것이다 (링크: 박문호 박사). 
 
이와 같이 철학, 과학, 의학, 심리학,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몸이야 말로 우리 정신의 핵심이라는 논의가 상당히 이루어져왔지만, 여전히 우리는 정신을 주인으로 놓고 보는 근대 서양사상이나 주류 종교 사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도 우리의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 몸은 존재의 근거이자 정체성의 원천이고 자아실현의 도구임을 아무도 부정을 못 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가 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우리의 행복은 우리 존재의 근본이며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인 우리 몸을 사랑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확신한다. 손가락이 들어올려지고 새 소리가 귀를 통해 들리고 무지개가 눈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 등을 항상 기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면 몸의 모든 부분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몸의 생생함을 잘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몸의 생생함을 유지하는 길은 몸에 대한 경시나 학대, 그리고 잔인함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몸에 대한 관심이 왜곡되어 몸을 과시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몸의 학대로 변질될 수 있다. 또한, 과식을 하거나 단맛을 좇아 단 음식을 몸속으로 쏟아넣는 것도 일종의 몸 학대라고 생각한다. 쉰다는 구실로 몸을 움직이지 않고 마냥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것도 몸의 경시를 넘어 학대라고도 볼 수 있다. 내 몸의 신진대사가 어디 하나 이상이 있다는 것도 내가 살아오면서 몸을 어떻게 대했는 지를 가르키는 바로미터가 된다.
 
반면, 몸에 적절한 좋은 스트레스나 고통을 주는 것은 역설적으로 몸을 사랑하는 것일 수 있다. 적절한 움직임과 운동을 통해서만이 몸이 활기에 넘치고 살아나기 때문이다. 유명한 뇌과학자 폴 블룸(Paul Bloom)이 쓴 최선의 고통(Sweet Spot, 링크)이라는 책에서 나오듯이, 진정한 행복은 끊임없는 몸의 안락과 쾌감 추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가하는 몸의 고통을 통해서만이 얻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고통은 몸에 적절한 스트레스를 주는 건강한 운동이나 등산 같은 것을 말한다. (나의 이전글, "개고생 vs. 꿀고생" 참고, 링크)

주변에서 등산을 하지 않는 사람들한테서 왜 올라갔다가 내려 올 것인데 굳이 번거롭게 산을 오르냐는 물음을 자주 듣는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대답을 해 주고 싶다. 의도적으로 선택한 도전과 고통을 감내한 후에 오는 활력이야 말로 몸과 마음이 원하는 진정한 ‘찐’ 행복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몸 그림 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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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공 2024.01.24 21:50

    참고한 책이나 기사, 강연입니다. 

    Bloom, Paul (2021). The Sweet Spot: The Pleasures of Suffering and the Search for Meaning Hardcover. https://a.co/d/3UOMSe4

    논문Oh, S.S. (2014) “Universality and specificity of conceptualization of FEAR in Korean and English.” Korean Semantics 44.2, 141-170. 한국어와 영어의 두려움 개념화의 보편성과 특수성. 한국어 의미학 44.2., 141-170. https://kiss.kstudy.com/Detail/Ar?key=3256918

    박문호 박사 강연: "느낌에 대한 뇌과학 보고서" https://youtu.be/0ylcGL-IbZo?si=tfR9RHIYc4uUXya0

    김주환 교수 강연: "나는 몸이다 - 물리적 신체와 소매틱 신체": https://www.youtube.com/live/kLAaWxYi-To?si=lRH9j5ep7efRo2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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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공 2024.01.25 09:17

    메를로-퐁티(Merleau-Ponty)는 우리의 지각과 인지 능력은 몸을 통해 세상과 상호 작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 사물을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고, 듣고, 느끼는 과정에서 사물을 지각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이러한 몸의 지각 경험을 통해 형성되며, 따라서 몸은 우리의 마음을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고 했습니다. (Merleau-Ponty, Maurice. Phenomenology of Perception (지각의 현상학). Routledge, 2002. p. 204)

    니이체Nietzsche)는 그의 역작 ‘‘짜라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Thus Spoke Zarathustra)”에서 그의 몸의 철학을 드러냅니다. “몸을 경멸하는 자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그대들은 다른 가르침이 필요없다. 대신에 신체에게 작별을 고하고 입을 다물면 된다….몸은 하나의 거대한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로 궤어진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이며, 가축의 무리이자 양치기이다.… 형제들이여, 그대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 작은 이성도 육체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의 위대한 이성은 몸의 작은 도구이며 장난감일 뿐이다". 

    니이체는 “육체에 대한 경멸은 인간 자신에 대한 불만족의 결과”라고 설파하고 몸의 바탕을 둔 삶을 중시했고 그 삶을 온전히 살수 있게 해주는 ‘신체’를 최고의 이성으로 치켜 세웁니다. 몸에 ‘거대한 이성’이라는 왕관을 씌웁니다. ‘이처럼 신은 죽었다’, 삶의 철학, 초인의 삶을 주창한 니이체가 플라톤과 기독교적 영원불멸의 영혼과, 또 데카르트적 이성적 자아에 도취해 있는 거대한 서양 정신을 단칼에 베어 버립니다. 초인으로서 인간의 자기극복이란 몸의 건강과 온전함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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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rganic 2024.01.25 12:20

    온전한 몸이 없을 때, 우리는 존재의 의미도 가치도 잃어버리고, 정신은 바닥으로 추락하고 만다. 심신의학(psychosemantics)에서 몸과 정신의 통합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체화된 마음(embodied mind)라는 개념에서 몸의 중요성을 주창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지각 경험을 통해 형성되며, 따라서 그 지각의 핵심인 몸이야 말로 우리의 마음을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몸 > 감정 > 기억 > 인지로 연속체로 진화한다. 우리 몸은 존재의 근거이자 정체성의 원천이고 자아실현의 도구이다. 몸의 생생함을 잘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몸의 생생함을 유지하는 길은 몸을 학대와 잔인함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몸에 적절한 좋은 스트레스나 고통을 주는 것은 역설적으로 몸을 사랑하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내가 선택해서 가하는 몸의 고통을 통해서만이 얻어진다. - 창공님

    우리 산악회의 신체적 고통은 바로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 ?
    에코 2024.01.25 14:16

    몸을 사랑하는 방법이 몸에게 적절한 스트레스와 통증을 주어서 몸을 활기차게 만든다는 거에 동감합니다. 몸에 자극을 주어야 몸이 살아나려고 재생하고 복원한다는 거죠.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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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mad 2024.01.25 17:58

    전적으로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20년전부터 말로는 '몸은 하나요 마음은 순식간에 천갈래만갈래 나눠질 수 있다'면서 몸이 가장 정직하다면서 건강과 사랑에 대한 개똥철학을 이렇게 입에 달고 살았는데요...

    저도 미국와서 감사히 베산을 만나고 산행을 하면서 근육이 강화되고 자연과 하나되는 신체적 건강과 물아일체에 인생의 기준을 더더욱 두게 되었습니다.

    창공님의 경험과 글내용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profile
    창공 2024.01.25 20:48

    오랜만입니다, 노마드님. 한국 잘 다녀오셨나요?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신체건강과 몰입에 인생의 기준을 둔다는 말씀에 급공감합니다. 
    제가 보니까, 생활 속의 많은 관계나 일 속에서 삶의 기쁨을 찾느냐, 나에게 집중을 해서 만족을 얻느냐의 기로에 설 때가 많은 것 같아요. 
    그 증거로 제가 한국에만 가면 사람 만날 일도 많고 다닐 일도 많아지면서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자연히 줄어들고 이에 따라 운동도 못하고 내 몸 관리도 잘 안 되더라고요. 반면에, 미국에 사는 삶은 보다 단순해서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많고 운동 등을 통한 내 몸 관리도 훨씬 쉬워지고요. 각자가 주어진 삶에서 밸런스 맟추기가 어려울텐데, 나이가 들 수록 후자쪽으로 기우는 게 삶의 질에 좀 유리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고요. 복잡한 삶을 단순화하자, 이게 저의 모토입니다만,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는 거겠지요. 재미있는 지옥인 한국과 재미없는 천국인 미국 생활 사이에서, 이제 너무 재미없는 천국에 젖어 버린 게 아닌가하는 조심스런 성찰도 있고요. 

  • profile
    창공 2024.01.26 08:44

    본문에 언급한 요가, 불교, 한의학에서 몸을 바라보고 다루는 부분에 대한 추가 사항입니다. 

    요가 철학은 몸을 전체주의적(holistic) 관점에 입각해서 몸과 정신과 마음이 하나로 연결된 통합체로 본다는 것이 핵심일 것입니다. 요가 수련을 통해 몸과 마음의 조화로운 관계를 만드는 게 목표인 바, 마음 챙김이 있는 움직임, 호흡법, 명상을 통해 신체 인식, 감정조절, 내면의 평화를 추구한다는 점이 ‘몸의 철학'과 관련해서 시사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이 경우에도, 이 통합체의 시작은 몸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약간 색깔을 달리해, 몸은 영원하지 않는 무상한 존재이고 이런 몸에 대한 집착은 고통의 윈인이 된다고 가르칩니니다. 하지만 불교는 이러한 무상함과 고통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길도 동시에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몸과 사물에 대한 집착을 풀고, 마음을 명상을 통한 지혜로 단련함으로써, 우리는 몸과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몸은 고통의 근원이 될 수 있지만, 또한 해방의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명상을 훈련함으로써, 우리는 마음챙김, 자비, 그리고 지혜를 키울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고통의 끝과 평화와 해방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와 같이, 다른 종교와는 달리, 금욕주의나 신체 건강을 소홀히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점, 몸의 제한을 인정하면서도 몸의 성장과 변화 가능성을 인식하며 균형 잡힌 삶을 추구하도록 권장한다는 측면에서 큰 시사점이 있습니다. 

    한의학에서 몸과 마음과 정신을 통합체로 보고 몸을 이 연결체에서 떼어놓지 않고 다루는 점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일 것입니다. 물론, 생명의 원천인 에너지(=기)에 대한 과학적인 논의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지만 이것도 몸이 존재의 바탕이라는 점은 같은 맥락을 갖습니다.

  • profile
    Organic 2024.01.26 09:06

    눈감고 앉아서 하는 명상을 할 경우 잠에 빠져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등산은 끊임없이 오르막 내리막 길을 걸으면서 좋은 자연 명상 환경을 제공합니다.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와 같은 자연의 소리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청 주파수 전체를 자극하기 때문에 결국 아무 자극도 하지 않는 백색 사운드 효과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매일 한 시간 정도 걷는 등산이 우리 뇌에 최적의 자극을 받는 환경이라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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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공 2024.01.26 10:10

    동의합니다. 자연은 신체 건강 뿐만아니라 최고의 정신 건강을 제공하는 환경이라는 것을 늘 체험으로 확인합니다. 말씀하신 백색 소음(White Noise)은 종류에 따라 집중과 이완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방해가 되기도 한다는데, 이 경우 먼저 명상을 통해 지각력을 증진시킨 후에 자연으로 나간다면 그야 말로 자연의 백색 소음을 최적으로 활용해서 몸의 활기와 평화의 에너지로 전환,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을까 합니다. 몸의 지각력을 높이면 운동의 효과를 인지하는 힘도 배가 되고 두뇌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