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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칼 32> 불평등을 사랑하는 나라 (2부)

by 창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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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칼 32> 불평등을 사랑하는 나라 (2부)
 
 
때는 2020년 9월, 독일의 40여개의 도시에서 일제히 정부에 항의하는 성난 시위대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당시 독일 총리가 그리스에 머물던 난민 1만2천명 중에서 천5백명을 받겠다고 선언한 뒤에 벌어진 일이다 (링크). 
 
처음에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난민들을 수용하려는 총리의 계획을 반대하기 위해서 시위가 벌어졌을 거라고 예측을 했다. 그런데, 사실은 놀랍게도 정반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난민들의 일부만을 받겠다는 정부의 모욕적인 처사에 항의하기 위해서 수많은 독일 도시에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즉, 난민 일부가 아닌 모두를 수용하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희한하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지구상에 이런 인종이 있다니 말이다.
 
2015년부터 지금까지 갤럽 조사에서 독일은 이 지구 상에서 가장 “찬탄 받을"나라로 매년 1위를 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 징표 중의 하나는, 메르켈 총리가 독일에서 지금까지 수용한 난민 수는 400만이 넘는다고 한다. 우크라이 전쟁이 반발했을 때도 독일은 독보적으로 2백만명의 난민을 받았다고 하고 지난 10년 간 수용한 총난민은 거의 천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링크). 
 
수십 년 전 최악의 전범 국가가 어떻게 이런 최고의 모범 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었을까? 이 믿기지 않는 기적과 같은 미스테리에 대한 답의 단서는 독일 교육의 현장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독일 전문가 김누리 교수에 의하면, 독일 대학 캠퍼스를 보면 얼마나 독일인들이 한국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다. 즉, 그들의 대학 캠퍼스는 단지 공부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활발한 공론장으로 캠퍼스 곳곳에는 사회 정치 이슈들의 전단지들이 쌓여있고 이들에 대한 성토와 토론이 일상사로 벌어진다. 그만큼, 독일 대학생들의 국내와 국제 문제에 대한 현실 인식 수준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이다.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고 개인의 생존 경쟁에 매달리느라 현실 참여가 낮은 한국 대학생들의 모습하고는 너무나 대조를 이룬다.
 
이렇게 한국과 다른 모습은 대학 캠퍼스에 그치지 않는다. 초등학생들마저도 전 세계의 주요 문제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거리로 나와서 시위를 벌인다고 한다 (링크). 한 예로 북아프라카 난민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강제 송환을 반대하기 위해서 초등생들이 베를린 시내의 2개의 차도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고, 이에 정부가 강제 송환을 1년 미룬 유명한 사건도 있다. 이는 어릴 때부터 전 세계의 고통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독일 교육의 결과이다. 독일 교육은 아이들에게 세상의 고통에 대해 서로 연대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줘서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인간들을 양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독일은 1970년대에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라는 기치아래 새로운 개혁 시스템을 도입해서 경쟁을 교육 현장에서 완전히 몰아내 버렸다. 한 마디로 경쟁을 인간 퇴보의 원흉으로 본 것이다. 하여, 독일에는 대학 입시가 없고 고등학교 졸업 시험만 있을 뿐이다. 이 졸업 시험 성적을 가지고 원하는 대학은 아무나 갈 수 있고 또 언제나 갈 수 있기에 대학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다. 즉, 확신이 설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50년 동안 이렇게 경쟁을 안 시켰더니,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성숙한 민주주의자들, 존엄이 있고 책임감 있는 자유인들이 넘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장 추앙 받는 도덕적 권위를 인정 받는 사회로 발전한 것이다. 
 
독일은 왜 경쟁을 부정적으로 봤을까? 히틀러 파시즘 때문이다. 히틀러 사상의 핵심은 경쟁, 우열, 지배 등인데, 이는 우월한자가 열등한 자를 지배햐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를 만들었고, 결국 나찌주의가 창궐하는 야만의 역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독일인들은 2차대전 후에 이에 대한 철저한 각성과 반성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최악을 최선으로 바꿔왔다는 점에서 전화위복의 국가가 되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일제에서 해방이 된 이후에 건전한 지도자가 나오지 못했고, 이로 인해 역사에 대한 반성과 정리 없이 일제 교육의 잔재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 이어 독재 시대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교육 개혁을 할 기회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산업화를 위한 인적 자원 양성이라는 미명으로 경쟁만이 넘치는 사회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교육은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극단적 보수로 전락한 기득권층을 옹립하는 방향으로 흘러왔고 지난 100년 간 한국은 교육 개혁을 한 번도 제대로 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독일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가장 강조하는 것이 비판 교육이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선생님들은 모든 것을 믿어도 “내말은 믿지 마세요", “내 말에 대해서 비판 의식을 가지세요", 하지만 “나를 비판할 때는 항상 근거를 갖고 하세요.”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하여, 어릴 때부터 주체적으로 비판하는 법을 가르치고, 대학을 마칠 때까지 어떤 관념이나 가치도 스스로 생각해서 비판해 본 후에 받아들이는 습성을 길러준다. 
 
이에 비해 한국 교육은 ‘완전 죽은 물고기를 만드는’ 교육인 셈이다. 대학을 마칠 때까지도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하는 것보다는 기존 시스템을 답습하고 남을 이기고 살아남는 것에만 몰두함으로써 성숙한 민주 시민도, 책임있는 자유인도 양성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남과 싸워서 이기는 파시스트들만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경쟁 이데올로기에 매몰시켜 스스로 (나의 불행은 나의 못남에 있다는 식의) '자기 착취'를 하는 인간들을 만들어 내고, 불평등도 잘 받아들이며 성공하지 못함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려 극단의 경우는 자살을 부추기는 사회로 전락해 버렸다. 인생에서 감수성이 예민하고 지적인 호기심이 가장 강할 때, 많은 것을 경험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책에 빠져 지적인 탐구를 모색해야 할 때, 한국의 청소년들은 오로지 대학에 가기 위해서 죽은 지식들을 암기하고 기계처럼 문제집을 풀고 앉아 있다. 교육이 창의적이고 비판적 사고의 소유자는 고사하고 전부를 바보들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무비판적인 교육을 통해 돈이 되는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게 아직도 최고의 목표가 되는 나라, 공부만 잘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이런 환경에서 어떤 존엄성(dignity)을 지닌 인간들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제, 지금 ‘한국 교육은 적당히 빨아서 쓸 수 없다’는 김누리 교수의 말이 우리를 식겁하게 만든다. 교육부터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현재 우리 고국이 겪는 최악의 불평등 국가, 초저출생 국가, 최악의 갈등 공화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이 교육 개혁의 첫 단추는 폭력과 같은 능력주의경쟁 이데올로기를 없애는데서 시작된다. 이를 위해, 독일처럼 대학 입시를 없애고, 대학의 서열을 없애며, 대학 등록금도 없애는 것이 개혁의 단초일 것이다. 그러면 몰개성적이고 비인간적인 경쟁과 국력 낭비인 사교육도 자연히 없어지고 초저출생 문제도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 이제 한국은 갈림길에 놓여 있다. 현상 유지로 나락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대개혁으로 도약의 길로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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