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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semite 이야기

by 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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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Yosemite 는 참많은 여러가지 기억들을 안겨주는 곳입니다.

 

제가 처음 요세미티를 방문한것은 꿈많고 지금 돌아보면 아련한 시절이었던  1984년도 대학교 MT 때였습니다.  120번 타고가다 터널View 에서  처음 내려다본 Yosemite Valley 는 감성이 부족한 저에게도 너무나 아름다웠고 앞으로도 자주올거 갇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1984년 첫방문후 1987년까지 매년 여름이면 갇은 모임하던 유학생 애들과 우루루 몰려가 캠핑도 하고 차타고 이곳저곳 돌아보고 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당시는 켐핑장 잡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던 기억이구요.

 

그러던중 1987년 저에게는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오는  요세미티에서의 사고의  아픈 기억이 있어 그후 10년정도 요세미티는 피하고 안갔었습니다.

10년 정도 지난후 비로소 개인적 아픔으로 남아있는 트라우마를 극복해야 되겠다 싶어 일부러  매년 요세미티를 자주 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까지 요세미티 방문을 30번정도는 한거갇고 특히 지난 몇년간은  못가본 트레일들 위주로 많이 다녀본거 갇네요. 

자주찿다보니 참 많은 에피소드들도 있습니다. ㅎ

 

저는 다시찿기 시작하고 난후 겨울 요세미티도 좋아해 저희집 애들이 조금 어릴때는 주로 Badger Pass 스키장을 자주 갔었습니다. 겨울이면  매달 2 ~3 번 정도 찿았었는데 보통 Curry Villeage 나 Yosemite Lodge 에 머물고 아침 8시가 되면 Lodge 앞에서 Glacia Point 뒤편  Badger Pass 스키장으로 가는 무료 셔틀버스가 있어 그걸 자주 이용했었습니다.

한번은 Yosemite Lodge 에 조금 밤 늦게 도착해 피곤도하고 짐 옮기기도 귀찮아 아직 겨울인데 설마 싶어 차안에 음식물과 짐들을 그대로 넣어두고 들어가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아뿔싸.. 

뒷창문 박살나 있고 시트 찟어지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때가 애들 2월말 Spring Break 때였던걸로 기억하는데 곰이 전부 겨울잠 자는줄 알았더만 겨울잠 안잔건지 배고파 일찍 깬건지 2월말에도 돌아다니며 차부수고 음식훔쳐 가는곰들 있다는거 처음 알았습니다.

 

또다른 조금 섬뜩한 한가지 기억은  한번은 갇이 일하던 젊은 직원들이 캠핑 가자고 졸라서  여자둘 남자 한명 이렇게 셋데리고 요세미티로 백팩킹을 갔습니다.  저도 당시 백팩킹은 많이 하던 편이 아니라 미련하게 쌀, 김치, 통조림부터 시작해 얼마나 먹을거라고 한 50파운드 짊어지고 미련하게 Mist Trail 로 올라갔습니다.  갇이간 일행도 체력이 부족했는지 아침 11시 밸리 출발했는데 처음 텐트를 칠수있는 Little Yosemite는  도착도 못하고 Nevada Fall 에 도착하니 벌써 어두워질려고 해서  할수없아 부근에 텐트치고 대강 끼니 때우고 불피우고 좀 앉아있다 취침 하였습니다.

두개의 텐트안에 모두들 골아 떨어지고 저도 잘려는데 어슬픈 잠이 들었을 무렵 제가 있는 텐트가 흔들리고  바깓쪽에 뭔가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곰이 왔나 싶어 골아 떨어진 일행은 못깨우고 두려움을 무릅쓰고 손전등 들고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것도 안보였습니다.  1시간후쯤 다시 살짝 잠들었는가 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잠결인데 분명 텐프 지퍼를 여는소리가  들립니다. 

 

꿈을 꾼건지 현실인지 멍한 상태로 다시 잠깨 정신차리고  또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고 하여튼 조금 으시시한 밤이었습니다.

하도 이상해 자는둥 마는둥 아침에 일어나 조금 쌀쌀해 긴바지 입을려고 보니 자기전 텐트 안쪽 입구 옆에 벗어둔 바지가 안보입니다. 

아무리 생각하도 이상하고 바지안에 열쇠랑 지갑도 들어 있는데 찿을수도 없고하여 그날 일정을 접고 하산 하였습니다.

근데 생각해보니 그전날 이상했던건 저희들이 낑낑거리며 네바다 폭포쪽으로 올라가고 있을때 젊은 남자 (20~30대 정도) 두명도 재법 먼 거리를 두고 저희들을 계속 따라 왔던게 기억에 납니다. 속으로 곧 어두워질려고 하는데 먼저가지 왜저리 계속 따라오지 하는 기억도 났지만 꿈에도 의심은 못했습니다.  

하여튼 일찍접고 하산하여  트레일 헤드에 세워둔 차에 도착하니 열쇠도 없어 문도 못열고 하필이면 데리고간 일행 두명은 이틀후 한국가는 비행기표 끊어둔 상태였습니다.

할수 없어 크레딧카드 하나 빌리고 모두들 짐 제차 부근에 두고 그날오후  Merced 로 가는 버스 태워 보냈습니다.

Merced 가면  산호제 가는 기차있어니 그거타고 가라고 보냈습니다. 그리고 맨몸으로 Nevada Fall 까지 짐다팽겨쳐두고 1시간 30분만에 (요건 최단시간 주파 기록에 도전해도 될듯 ㅎ) 미친듯 뛰어 올라가 텐트쳤던 부근 다시 샅샅히 뒤져봐도 열쇠랑 지갑 들어있는 바지 찿지를 못했습니다.  

 

다시 내려와 빌린 크레딧 카드로 겨우 요세미티 부근  Lock Smith 연락하여 부르니  와서 차문은 열어주는데  차열쇠는 없어 열쇠 카피는 못만들어 준다네요.

할수없이 Yosemite Lodge 에 머물며 집에 전화해 상황 설명하고 일행들 기차역에서 픽업하라 그러고  여유분 열쇠 Fed Ex 로 보내라하니 시간도 늦었고 요세미티라 Fed Ex 도 열쇠 도착까진 이틀정도 걸린다네요. 짐은 차문을  다시 잠그지도 못한채  차안에 전부 쳐박아 놓고 몸만 Lodge 에 머물고 있던 다음날 TV 뉴스에 요세미티에서 유럽에서 여행온 틴에이저 여자 두명이랑 엄마가 실종되어 찿고 있었는데 세명이 살해된채  차가 메리포사부근서 발견되었다고  요세미티에서 이런일은 처음이라고 뉴스에 난리 났네요. 

 

저도 그 뉴스듣고 이틀 전날밤 일이 너무 이상하고 해서 신고해야 되겠다 생각 되었습니다.

Vistor Center 찿아가 레인저랑 경찰한테  제 경험 진술하고 했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는 요세미티에는 관광객들이 많이와 스탁턴, 프레즈노등 센트럴밸리 지역서 나쁜목적으로 요세미티 오는 부랑자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네요. . 불행중 다행으로 지갑이랑 열쇠만 훔쳐갔어니 다행이지 아무도없는 산속에서 젊은여자도 둘이나 있었는데 혹 다른 마음 품었어면 어찌 됐을까 지금 생각해도 섬뜩합니다.  보통 자연을 사랑하고 캠핑 오시는분들은 모두들 좋은사람들이지만 요세미티처럼 세계서 몰리는 관광지에는 도난사고가 많다고 하니  혹 여러분들도 이지역 산행하실땐 귀중품 관리 잘하시고 Wildness 캠핑땐  곰보단 사람이 무서운거 갇으니 혹 여성분들만 Wildness Backpacking 하실땐 꼭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이틀후 저의 바지가  Curry Villeage  샤워실 쓰레기통에서 발견했단 소식과 (물론 지갑과 열쇠는 없이) 그젊은 두명의 남자가 살인사건 연관자는 아닌거 갇다는 연락  들었습니다. 기억으로는 1998년도의 7~8월경의 일이었던거 갇습니다.

 

다음해에 또 조금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경험을  이번에는 완전한 저의  불찰로 또하게 되는데요. 

하여튼 사건도 많고 제가 칠칠 맞습니다 ㅎ .

로마에서 신부로 사목하고 있는 사촌동생이 방문해 저희집에  2주정도 머무는동안 이곳저곳 둘러보고 요세미티도 데려갔습니다.

Valley 에서 하루 머물고 조금 늦은 오전에 출발하여 제가 자주찿는 Nevada Fall 로 또 올라갔습니다.

1시쯤 도착했는데 그날은 웬지 물두개 달랑 챙겨 올라가서 체력이 많이 남았습니다. 힘들어하는 사촌 신부님보고 John Muir Trail 타고 내려가면 쉬우니 먼저 내려가 쉬고 있어라  그러고 나는 조금만 더갔다 내려가겠다  그러고  Half Dome 쪽으로 향했습니다.

가다보니 욕심이 생기고 Half Dome 은 아직 못가봤지 시간 계산도 없이 조금만 조금만 더 하다보니 핼프돔까지 가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당시에만 해도 핼프돔은 퍼밋이 필요없었고 제가 늦어 그런지 거의 저 혼자였습니다. 가다보니 Quarter Dome 지나 핼프돔 케이블앞에 도착했는데  그제서야 비로소 6시가 훌쩍 넘었다는거 알았고 사람들도 아무도 없고 혼자 올라가기도 으시시 하고 해서 다행히 발길은 돌렸는데 ㅎ.

 

나는 내가 Nevada Fall 에서 그리 멀리 온줄 몰랐습니다. 헤드렌턴도 없지 내려오는데 날은 어두워지지 전화는 안터지지  조난 당하는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더큰 문제는 산호제 집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사촌 신부님이 내려가  기다려다 너무 걱정되어 형수에게 전화를 한모양입니다.

저녁 8시쯤 전화한 모양인데 조금 기다려보자 하다 어두워지고 차츰 상황이 심각해져  119 신고하고 레인저 스테이션 연락하고 발칵 뒤집혔습니다.

헬기 띄워 수색까지 요구한 모양인데 밤에는 어찌할 방법이 없어니 날이 밝을때까지 기다려보라 한 모양입니다. 그믐에 가까웠는지 한줌  불빛도 없이 내려오는 저도 참 쌩쇼 했습니다 ㅎ

밤 12시쯤 겨우 Nevada Fall 부근 도착하니 5% 배터리 남은 전화기가 비로소  터집니다 ㅎ

 

Curry Villeage 도착해 방전되어버린 전화기 대신 겨우 사촌 전화기로 새벽 2시 30분에  집으로 통화하니 ...........................   

에고 상상할수 있겠죠 ?? 무슨 소릴 들었는지 

1년치 욕 다듣고 요단강 , 미친*, 정신나간 *, 보따리 싸놓을테니 ***,  하여튼 30분동안 동안 전화기속의 속사포로  고막 터지도록 전화기 들고  차렸자세로 있었습니다.

중간에 우는소리도 들려와 살아와 반가워 우냐 했더만 이기회에 큰 생명보험 큰거 몇개 들어뒀어면 팔자 고칠건데 아까워 운다 그럽디다 .

아마 신부님의 간절한 기도로 무사 귀환했나 봅니다.  ㅎ

험준한 자연에서 살아돌아온 불굴의 자연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몇달 지내고 요즘도 요세미티 간다 소리 못하고 지금도 여기갈땐 다른데 간다 그러고 1년에 두세번 정도  혼자 몰래 다녀옵니다 ㅎ.

 

저한테는 참 사연도 많고 그러면서도 자주찿는 요세미티네요.  2000년도가 지나면서 부터는 주말이면 공원입구랑 밸리 트래픽도 차츰 심해지고 방문객들도 엄청 늘어난가 같습니다.

지금은 코로나 사태때문에 미리 허가를 받아야하고  방문자수를  제한하니 80년대 처럼 조금은 조용할듯합니다.

 

 

각설하고...

요세미티의 어원은 Yohhe' meti 또는 Yose'meti 라는 이곳 원주민 인디언 말입니다.  요세미티의 아름다운 자연과 다르게 뜻은 침입하여 사람을 죽이는 "킬러" 라는 않좋은 말인데요

왜 이같이 안좋은 뜻의 인디언 말이 지명으로 붙어졌나하면 이것도 켈리포니아 골드러쉬와 연관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1849년 시작된 골드러쉬때 처음 금이 발견된 타호부근 Coloma 에서의 금찿기가 점차 어려워지자  금을  찿아  온 시에라 산속을 헤매며 금을찿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요세미티 부근까지도 금찿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또  그들중 일부는 인디원 원주민을 잡아 금이 발견되면  탄광 노예로 부릴 목적으로  인디언 원주민들도 죽이고 잡아가고 합니다. 또한 거친 남자들만 모인 상황이다 보니 인디언 여자들도 잡아가 겁탈하고 하는 만행도 합니다. 이에 분개한  Mariposa 부근에 거주하던 인디언들이 금을 찿아 요세미티 부근으로 온 광부들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일을 계기로 백인들은 군대를 파견하고 원주민 인디언들과 대규모 전투가 여러번 일어나게 됩니다. 그전쟁들이  바로 Mariposa Indian Wars 입니다.

Mariposa Musium 방문하시면시면 원주민 인디언들의 유적과 그때의 전투 상황들이 잘 전시되어 있는걸 보실수 있습니다.

 

결국은 군대를 보낸 백인들을 당할수 없어 인디언들은 침략해 들어오는 백인들을 Yose'meti (킬러) 라 부르며 요세미티 밸리쪽으로 도망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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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Mariposa War 때 들어온 기병대 입니다. 

 

이 첫번째 기병대를 이끌고 온 장교가 아래사진의 Major. James D Savege 라는 소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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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를 이끌고 인디언을 추격하다  졸지에 요세미티 밸리 지역에 제일 처음 발을 내딛은 백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디언을 추격해 들어와 첫날 브라이덜 폭포 부근서 야영을 하고 다음날 아침 말타고 산을 올라가 지금의 터널 View 부근서 도착해 내려다본 요세미티 밸리는 세비지 소령도 저와갇이 처음 봤을때의 감탄이었나 봅니다.

 

근데 요세미테라는 이름이 붙어버린 계기는 세비지 소령이 데려온 기병대중에  Lafayette Bunnell 아라는 장교가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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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사람입니다.

 

첫날 야영중 인디언의 습격을 모두들 두려워하고 있는 상태에서   인디언들이 침략해온 백인을 일컬어   인디언말로  "킬러" 또는 "습격자" 라는 뜻의 Yose'meti 라는 단어를  Lafayette 이라는 장교가 꺼꾸로 무심코  인디언을 지칭해 사용하였는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않아 그후부터 그게 요세미테를 지칭하는 지명이 되어버립니다. 

위키 백과등에 요세미테의 내력을 보게되면 이 Lafayette Burnnell 이란 사람이 요세미테 지명을 지은걸로 나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입니다.

 

 

요세미테는 크게 세지역으로 나누어 집니다.

흔히들 그냥 요세미티라 통용되어지는 Yosemite Valley 지역 , Mariposa 지역 그리고 Hetch Hetchy 지역으로 나뉘는데요.

그중 Hetch Hetchy 지역은 댐을 막아 만든 큰 호수 지역인거 아시죠?

 

우리가 물 귀한줄 모르고 막 쓰지만 샌프프란시스코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지역이 겨울 3~4개월만 비가오는 항상 물이 모자라는 사막성 기후입니다.

골드러쉬후 서부로의 이주로 인해  급격히 늘어나는 샌프란시스코  인구로 인해 항상 물부족에 시달려 정부에서 Hetch Hetchy Project 라는 요세미티에 댐을 만들어 수로를 통해 샌프란시스코에 물공급하는 역대의 토목 사업을 계획하게 됩니다. 지금은 지하수를 많이 사용해 의존도는  낮아 졌습니다만 아직도 이 헤치헤치 저수지물은 북가주로 공급되 1년내내 사용합니다.

근데 이 헤치헤치 저수지 프로젝트는 테디란 애칭으롤 불린 티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요세미티 방문후 감탄하여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였고 요세미티를 진정으로 사랑한 John Muir 의 노력으로 헤치헤치 저수지 프로젝트는 자연보호 차원에서 없던일로 됩니다.

 

그런데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이 일어나고 지진의 여파로 일어난 5일동안 일어난 대규묘 화재에 물부족으로 진압이 늦었단 황당한 이유와 지진후의 재건에는 물이  필요하다고 주장되어 다시 개발의 논쟁이 생기게  됩니다. 이 논쟁의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의 환경단체가 설립되어 정부와 아주크게 한판붙게 되지만 결국은 진행되어 헤치헤치댐이 1923 년 완공됩니다.

그때 설립된 최대 환경단체가 지금의 Sierra Club 이고 이클럽의 창시자가 그 유명한 자연 보호자인 존 뮤어 입니다.

 

여러분도 요세미티갈때 580번 부근 120번 부근따라 흐르는 관계수로를 보았을것입니다. 장장 136 킬로로 서울서 대전까지 거리의 대규모 토목 공사였습니다.

지금도 요세미티 헤치헤치 물로 센트를 밸리 농업용수와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식수로 주로 사용됩니다.  

 

물이 부족하면 국립공원이라도 저수지 만들어 물을 쓸수 있지 싶겠습니다. 그러나 물에 잠기기 전의 헤치헤치 밸리의 모습은 요세미티 밸리에 버금갔다고 합니다.

댐생기기 이전과 댐생긴 이후의 모습들을 보신다면 존 뮤어 형님과 자연보호자들이  왜그리 반대했는지 이해가 가네요.

 

댐이 생긴이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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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생기기 이전의 헤치헤치 밸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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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편리해 지지만  자연의 희생은 부수적으로 따라 오네요.

 

*쓰다보니 긴글이 되고 급하게 써내려 가느라 미처 오타 수정이나 내용검토 못했습니다.

혹 읽기 불편하시더라도 양해 바랍니다.